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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0. 10世 〉20. <부정공>상춘당공사실(賞春堂公事實)휘윤(諱倫)
1. 문헌 목록 〉10. 10世 〉22. <부정공>삼탄공휘대춘묘지명(三灘公諱大春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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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부정공>여절교위삼탄공휘대춘행상(勵節校尉三灘公諱大春行狀)
勵節校尉三灘公行狀 府君諱大春之自號三灘鄉黨子弟從遊而受讀者稱之以三灘先生趙氏系出玉川仕勝國爲光錄大夫檢校門下侍中諱璋三傳而有諱元吉初擧進士 忠穆王乙酉中文乙科與鄭先生夢周偰長壽等定策立勳封三重大匡輔國玉川府院君文章節行爲當時推重號農隱諡忠獻立祠本縣享武夷院是生諱瑜號虔谷麗季喪禮壞廢百日即吉而公獨行三年之喪前後居廬哀毀踰禮中生進文科官副正我 朝受禪義不食周粟仍與同志七十二人八于杜門洞言志錄曰首陽山月照我心肝 太宗徵以漢城判尹靈光郡事皆不就自松都挈家而南歸淳昌之虔谷以其先府君邱墓之鄉而兼亦封貫也又於晩節搬移于富有縣里文守正不阿特立獨行及其沒也 世宗大王嘉其忠靖以一品禮葬于順天府西住巖洞乙坐原又 命旌其門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渼湖先生金元行撰墓文表章忠孝與圃冶兩先生併美稱停故士林追慕聲烈享于順天謙川院高祖諱斯文 贈吏曹參議曾祖諱智崙蔭補奉列大夫參禮道察訪昆季四人友愛尤篤築亭謙川上而額曰相好祖諱穩以藝學稱世中生進階朝散大夫尚瑞院直長所生考諱淑琦以行誼聞除從仕郎所後考諱淑璟碩德懿行見重於世除忠順衛河西金先生表其墓曰性度端純行己以恭母夫人宜人全州崔氏三戒之女也府君生有儁才蔭補勵節校尉儀形端雅眉目秀朗自幼少時穎悟過人輕財好賢及壮志節磊落拋棄塲屋事甞曰士當利器俟時期以遠大而爲文不事耳口躬行考悌奉喪祭以禮處夫婦以敬敎子弟以義平居端正無疾言遞色胸懷坦蕩以篤思義正倫理爲要處己接物樂易多恕窮經懷寶 仁明之際見李芑尹元衡凶奸用事絶意世路杜門求志晦黙白守築亭於漾碧江上扁以漾碧不聞世事而終老於斯無愧爲元祐完人甞與河西金先生麟厚玉峰白公光勳結道義之交從遊講磨而潛心於性理之中放意於塵垢之外凡於聲色利祿漠然若亡或靜坐亭中或泛游江上風浴唱酬而依然有遠逝氣像噫當時諸賢叙述不爲不多而草本藏于長房家不幸中年厄於回祿從後採得只是流傳韻語若干言㝡宜尊信者河西先生 詩曰落魄論心志忘情酒一杯重峰先生題漾碧亭曰此去眞源知咫尺短筇何日事幽探兩先生平日推許敬服之微意因此可見亭址東畔有巨石倚立模刻公之眞像因稱醉巖至今父老往往傳誦又於前崕巖壁上刻同遊三賢姓名尚不磨泯焉故遠近章甫聞風景仰以爲杖屨之所不可無傳尚之禮義以爼豆而未果焉墓在順天府住巖面弓角山金洞之麓未坐原配宜人延安季氏進士參奉 贈吏曹參判繼長之女閨範甚備無育繼配宜人玄風郭氏尹末之女亦無育以伯兄秉節校尉諱大楠之子懋爲嗣擩染家庭學識精透行誼純篤薦除參奉娶文化柳氏生員認之女懋生三男二女長曰晫宣敎郎娶興德張氏副正字熙世之女次曰똹娶陽川許氏埬之女無嗣次曰晬宣敎郎娶光山金氏令汁之女女適士人柳永貞安愼之愼之竹山人文康公牛山邦俊之次子也晫生時聖通德郎號觀水亭修身謹恪事親至孝前後親喪居廬盡禮累擧鄉道狀娶廣州李氏瀷之女時聖生二男長曰維綱娶全州李氏忠順衛修敏之女次曰維紀娶延安李氏汝湛之女維綱生三男一女長曰之藩早卒無育以叔弟之珣之子泰望爲嗣號詠歸堂次曰之賓生二男二女長曰台望季曰弘望出系節愍公后孫慶泰士人偰珹洪汝鵬其二女壻也次曰之珣生二男二女長曰重望季曰泰望出系最長房之藩自餘男女難以盡載焉嗚呼府君之嘉言善行必多可傳而世代既曠兵燹屢㥘文獻率多湮沒生卒時日及筮仕年紀亦不可詳焉則其他又何所考據哉僅以家牒中所傳者撰次其萬一以待尚論君子之採擇焉 十二代孫 鍾息 謹述 여절교위삼탄공행장(勵節校尉三灘公行狀) 부군의 휘는 대춘(大春)이요 자는 춘지(春之)이며 자호는 삼탄(三灘)인데 그 문하에 서 수학한 향당 자제가 삼탄선생이라고 호칭하였다. 옥천조씨인 공은 건곡 선생 휘 유(瑜)의 후예로 고의 휘는 숙경(淑璟)인데 큰 덕과 아름다운 행실로 세상에서 추중(推重)하여 충순위(忠順衛)를 제수받고 김 하서 선생이 그 묘도에 표하되 성도가 단순하며 공손하게 행기하였다 하였으며 비는 의인(宜人) 전 주최씨(全州崔氏) 삼계(三戒)의 딸이다. 부군은 태어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음보로 여절교위(勵節校尉)에 보직되었고 형용과 거동이 단아하고 미목이 청수하여 어려서 부터 무리 중에서 뛰어나게 영오하였다. 재물을 가볍게 알고 어진이를 좋아하더니 장성하매 지절이 한걸차 과업(科業)을 포기하고 일찍이 말하되 『선비는 마땅히 비상한 재주로 때를 기다려 크게 기약할 것이요. 학문을 하면서 이목(耳目)이 좋아한 바를 일삼지 말고 몸소 효도하고 공경하여 초상과 제사를 예로써 받들고 부부간에 공경하며 자제를 의리로서 가르치고 평소에 단정하여 모진 말과 급한 빛이 없이 심지가 평평하고 넓어 의리를 생각하고 윤리에 바르게 처신하고 접물할 때 즐겁게 다스리고 많이 용서하며 경전을 연구하여 심신을 연마한 것이 요긴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인종(仁宗)과 명종(明宗)때에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이 음흉하고 간사하게 용 사 함을 보고 세상에 나갈 뜻을 버리고 집에 앉아 뜻을 구하며 묵묵히 스스로를 지켰으며 정자를 양벽 강가에다 지어 놓고 양벽(漾碧)이라 현판하고 세상일을 듣지 않은 채 이곳에서 한평생을 마치었으니 원우완인(元祐完人)에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다. 일찍이 하서 김인후 옥봉 백광훈과 더불어 도의로 사귀고 종유하며 강마하여 성리학 에 잠심하고 진세를 멀리하며 무릇 영욕과 득실에 초연(超然)하여 정자에서 묵상하고 강상에 배를 띄워 소풍 목욕 수창하여 탈속한 기상이 있었다. 아! 당시의 제현이 서술한 것이 많이 있어 초본을 종가에 장치하였더니 불행히 중 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그 뒤에 채집해 보니 다만 흘러다니는 시문 약간인데 가장 존신한 것은 하서 선생의 소작 영혼이야 흩어져도 심지만은 명백하고 한 잔의 술이지만 세상 정치 잊었구려(落魄論心志忘情酒一杯)는 시와 중봉 선생의 소작 참 근원이 여기에서 지척이건만 짧은 막대 짚고서 어느 날에 그윽한 것을 찾을 고(此去眞源知咫尺短筇何日事幽深)하는 시이니 두 선생이 평일에 추허하고 경중한 진의를 이로 인하여 상상하겠도다. 정자 터의 동편 둔덕에 비켜선 돌이 있어 선생의 영상(影像)을 모각(模刻)하고 인하 여 취암(醉巖)이라 칭도한 것을 지금의 야로(野老)들이 가끔 전송하고 또 앞 낭떠러지 바위벽에 새긴 세 현인의 성명이 아직도 선명한 고로 원근의 사림이 풍성을 듣고 흠앙 하여 선생이 거처하신 곳을 영구히 전하고 높이 예의로써 향사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 루지 못하였다. 묘소는 순천부 주암면 궁각산(弓角山) 금동지록(金洞之麓)에 있고 배는 의인 연안이씨 진사 참봉인 증이조참판 계장(繼長)의 딸로 부덕이 심비하였으나 아들을 기르지 못하였다. 계배는 의인 현풍곽씨 윤말(尹末)의 딸로 또 후사가 없어 백형 병절교위(秉節校尉) 대남(大楠)의 아들 무(懋)로서 후사를 삼으니 가업을 이어받아 학식이 정박하고 행의가 순독하므로 추천에 의하여 참봉에 제수되고 문화유씨(文化柳氏) 생원(生員) 인(認)의 딸을 처로 삼아 三남二녀를 두었으니 장자 탁(晫)은 선교랑 (宣敎郎)으로 흥덕장씨(興德張氏) 부정자(副正字) 희세(熙世)의 딸을 취하였고 차자 길(똹) 은 양천허씨(陽川許氏) 동(埬)의 딸을 취하였으나 자녀가 없고 三남 수(晬)는 선교랑으로 광산김씨(光山金氏) 영집(令汁)의 딸을 취하였고 여는 사인(士人) 유영정 (柳永貞)과 안신지(安愼之) 처인데 신지는 죽산인으로 문강공(文康公) 우산(牛山) 방준(邦俊)의 차자였다. 장방의 자 시성(時聖)은 통덕랑으로 호는 관수정인데 몸을 경건하게 닦고 어버이를 효도로 섬겨 전휴 친상에 예를 다하여 시묘하여 여러 번 향도장(鄉道狀)을 받았으며 광주이씨(廣州李氏) 익(瀷)의 딸을 취하여 二남을 두었는데 장자 유강(維綱)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충순위(忠順衛) 수민(修敏)의 딸을 취하고 차자 유기(維紀)는 연안이씨(延安李氏) 여담(汝湛)의 딸을 취하였다. 유강은 三남一녀를 두었는데 장자 지번(之藩)은 일찍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숙제(叔 弟) 지순(之珣)의 아들 태망(泰望)을 후사로 삼았는데 호는 영귀당(詠歸堂)이요, 차자 지빈(之賓)이 二남二녀를 두어 남은 태망(台望), 홍망(弘望)인데 홍망은 절민공(節愍 公) 경태(慶泰)의 후사로 출계하였으며 딸은 사인(士人) 설성(偰珹), 홍여붕(洪汝鵬)에게 출가하고 三자 지순(之珣)이 二남二녀를 두었는데 장은 중망(重望)이요, 차자 태망(泰望)은 종가로 출계하였으며 나머지는 자손이 번창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부군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반드시 많이 전하였을 터인데 세대가 이미 아득하고 병화에 문헌이 다 산실되어 생졸연월 및 초사년기(初仕年紀)도 자상히 알 수 없는게 그 다른 것을 또 어찌 상고할 수 있겠는가. 겨우 보첩에 기재한 바로써 그 만일을 가려 기술하여 좀 더 정확히 의논할 수 있는 군자의 채택을 기다린다. 十二代孫 鍾悳 삼가 기술함 註:※원우완인(元祐完人):송(宋)의 철종(哲宗)때 사마광(司馬光), 소식(蘇軾), 정이(程頤) 등과 왕안석(王安石) 등이 격렬한 당쟁을 벌였는데 여기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 ※이기(李芑):조선 중종시대(中宗時代)의 간신(奸臣)으로 많은 선비들을 모함하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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